한식 하면 대표적으로 비빔밥을 떠올립니다. 외국에서 한식을 홍보하는 행사에는 대형 비빔밥을 제작해서 경축하고 외국인에게 한식을 알리는 홍보 책자를 만들 때도 앞 표지는 십중팔구 비빔밥의 이미지가 쓰입니다. 외국인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에서 한국이라는 실체보다 비빔밥 기내식을 먹으면서 한국의 문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비빔밥은 매우 신비롭고 추상적인 요리로 여겨지지만 비빔밥만큼 실제적인 음식도 없습니다. 비빔밥을 살펴보면 하나의 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조건 없는 자유. 오랜 시간 사랑 받는 음식은 지혜의 손길로 만들어지고 이어져 왔습니다.
‘조건 없는 자유’란 비빔밥을 만드는 과정과 즐기는 과정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따로 재료를 사거나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제 지낸 제삿밥, 냉장고 안의 밑반찬, 산에서 캐온 나물 등 매우 실생활 적인 음식들의 조합이니까요. 만드는 사람은 이를 그릇 안에 동그랗게 재조합 하면 됩니다. 절반의 과정은 먹는 이의 역할입니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간장이나 고추장으로 간을 하고 쓱쓱 비벼 먹을 때 비로소 요리가 완성됩니다. 비빔밥만큼 형태도 틀도 없이 조건도 없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요리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히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어 변형되고 확장되며 오늘날까지 연결되었습니다.
비빔밥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예로부터 비빔밥은 형식에 구애 받지 않았습니다. 비빔밥을 가르쳐 주는 교재도 스승도 레시피도 따로 없었습니다. 어떤 존재도 요리도 아닌 삶을 닦아내고 공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음식. 그것이 바로 비빔밥의 시작이었습니다. 농촌에서는 오랜 논밭일을 하고 녹초가 되었을 때 아낙들이 이 반찬 저 반찬 따로 내지 않고 그릇에다 둘둘 재료를 얹어 먹었습니다. 따로 요리할 여력이 없었던 여인들은 이렇게 먹었을 때 다소 부실한 재료로도 맛있게 먹고 힘을 낼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익혔습니다.
산에서도 이런 풍경은 이어집니다. 토지 면적의 70프로가 산으로 이루어진 한국, 한국만큼 산나물이 다양한 곳은 세계에서도 드물었습니다. 산자락 사람들은 산에서 캐온 나물이 식탁을 채웠습니다. 계절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잎과 땅의 근원적 에너지를 머금은 뿌리는 세끼 밥을 뛰어넘어 약성을 지녔습니다. 농사가 되지 않아 풍족함이 없던 산골에서 사람들은 산채비빔밥을 해 먹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산자락에는 등산객들이 그 혜택을 봅니다. 한국의 명산에는 반드시 유명한 산채비빔밥 전문점이 있으니까요.
바다에서는 그날 잡은 횟감으로 회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게장을 만들어 게장 비빔밥을, 새우장을 만들어 새우장 비빔밥, 멍게를 잡은 날은 멍게 비빔밥을,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해안의 비빔밥은 별미 중에 별미였습니다.
반가나 궁중에서도 비빔밥은 중요한 음식입니다. 양반들은 특히 제사를 지낸 밤에 조상들께 올린 나물을 밥에 얹고 비벼먹는 음복이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그 맛이 참 좋아서 선비들은 비빔밥을 먹고 싶어 제사를 지내는 시늉까지 했습니다. 안동과 진주의 헛제삿밥이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궁중에서는 임금님 수라상에 비빔밥을 올렸습니다. 비빔밥은 이렇게 남자나 여자, 아이나 노인, 부자나 가난한 사람, 백성이나 임금님 모두 분별없이 모두 해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비빔밥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했지요.
비빔밥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
비빔밥은 고대 문헌에서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1800년대 말엽의 에 처음 등장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이전부터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권대영 한국식품연구원 식품기능본부 책임연구원 의 주장에 따르면 비빔밥은 시의전서 훨씬 이전인 16세기 말엽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混沌飯(혼돈반)’으로, 1724년의 청대일기(淸臺日記)에 ‘汨董飯(골동반)’으로 한자 명칭이 수록되어 있다고 제기했습니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에 비빔밥은 문헌으로 기재되었고 실질적으로 만들어 먹음은 훨씬 이전이지만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었기에 문자로 기록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비빔밥의 한글 명칭도 1810년의 몽유편(蒙喩篇)에 ‘브뷔음’이라는 한글로 기록돼 있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시의전서보다 100여 년 전인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이미 비빔밥을 한글로 기록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전집(星湖全集)에는 골동(骨董)이라고 해 골동반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낙하생집(落下生集)에서는 骨董飯과 骨董이 같은 의미로 비빔밥을 나타냅니다. 1724년의 청대일기(淸臺日記)에서는 비빔밥(汨董飯)을 먹고 급체와 설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도 비빔밥(汨董飯)을 먹고 변소를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음식관련서가 아니라 문집에 기재 되었기에 관심을 덜 받을 뿐이었지만 이들의 기록이야 말로 삶 안의 음식 문화 였습니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비빔밥을 骨董飯이라고 해 채소비빔밥, 잡비빔밥, 회비빔밥, 전어비빔밥, 대하비빔밥, 새우젓갈비빔밥, 새우알비빔밥, 게장비빔밥, 달래비빔밥, 생오이비빔밥, 김가루비빔밥, 고추장비빔밥, 황두비빔밥 등 다양한 비빔밥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평양의 비빔밥이 유명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다양한 비빔밥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70년의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骨董飯골동반 取飮食雜和飯俗言捊排飯 부빔밥 又曰谷董’으로 기록, 비빔밥을 한자로는 ‘骨董飯’이라고 쓰고, 부르기는 ‘부빔밥’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부빔밥을 한자로 기록할 필요에 의해 부빔밥 소리와 유사한 한자 ‘부비반(捊排飯)’을 만들어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비빔밥을 한글로 기록하기 이전에는 골동반(骨董飯, 汨董飯)으로 쓰거나 골동반을 약칭해 골동(骨董, 汨董)이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비빔밥을 혼돈반(混沌飯)이라고도 했습니다. 따라서 비빔밥의 어원이 골동반이라는 주장은 문자에만 의거한 단편적인 것이며 말로는 지금의 비빔밥이라는 소리와 흡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주와 진주, 상주에서의 상품화
비빔밥이 일상의 음식에서 조금 더 고급화 되어 상품화 된 곳은 전주와 진주, 상주가 대표적입니다.
비벼먹는 밥 이라는 평상성에서 분리가 되어 일체성, 존귀한 유형성을 지닙니다. 비빔밥이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팔리게 된 것입니다. 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비빔밥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식당이 유명해 졌습니다.
일상에서 그 누구나 해 먹는 요리가 이제는 식당에서 돈 주고 사 먹는 고급요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가가치가 필요했습니다. 전주는 1950년도에서 60년 사이에 비빔밥을 만들어 파는 식당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릇부터 다르게 시작했습니다. 놋그릇으로 귀족적인 담음새를 연출하는가 하면 곱돌을 써서 솥밥의 따스함을 끝까지 지니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누룽지처럼 바삭한 맛을 즐길 수 있게 말이죠. 식재료도 고급스러워 졌습니다. 육회를 얹고 황포묵을 쑤어 황금색을 더합니다. 잣과 은행 등의 견과로 고소함도 눈에 보이게 하죠. 재료들을 늘여놓는 모양은 흡사 코스모스와 같습니다. 색색이 나물을 동그랗게 꽃잎 모양으로 늘여 놓고 꽃술 부위에는 가장 핵심이 되고 영양가가 높은 육회나 계란 노른자로 완성합니다. 위에서 바라보면 한 그릇 꽃이라 하여 전주에서는 “꽃밥” 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1970년대 서울의 유명백화점으로 진출하면서 비빔밥 하면 전주 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놓았습니다.
진주의 비빔밥은 그 형태가 다릅니다.
머리를 다듬은 숙주나물, 시금치, 어린 고사리, 도라지나물, 등을 넣고 바지락을 곱게 다져서 참기름으로 볶다가 물을 넣어 자작하게 끓인 액을 한 먼저 밥에 얹습니다. 소고기 육회를 쓰고 전통방식으로 숙성한 간장에 재래된장과 고추장을 섞은 엿꼬장이라는 양념장을 비벼 먹습니다. 전주에서는 콩나물국과 내는 반면 진주에서는 얼큰하게 끓인 선짓국을 곁들입니다. 선짓국 국물을 한술 떠서 비벼 먹어도 맛이 으뜸입니다. 간혹 전주와 진주 사람들이 비빔밥은 자신들이 원조라고 하지만 큰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과 군관민 부녀자들이 식사를 위해서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 또한 하나의 흥미로운 ‘설’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주는 바로 비빔밥이 기재된 고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가 발견된 고장입니다. 심환진이 상주군수로 부임한 1919년쯤 그곳의 반가에 소장되어 있던 조리책 하나를 빌려서 대구인쇄합자회사에서 인쇄한 상주 군청의 편면괘지(片面罫紙)에 모필로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 책은 며느리 홍정한테 전해졌습니다. 이후 1970년대에 홍정의 조카인 탐구당 출판사 홍성우 대표를 통해 한양대학교 이성우 교수에게 전달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1981년에는 같은 대학의 이효지 교수가 ‘시의전서의 정리학적 고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시의전서는 상·하 2편 1책이며 상권에 226가지, 하권에 196가지로 총 422가지 음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의전서에는 비빔밥을 만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밥을 정히 짓고, 고기는 재워 볶아 넣고, 간납(간과 천엽)을 부쳐 썰어 넣고, 각색 나무새(채소)도 볶아 넣고, 좋은 다시마로 튀각을 튀겨 부숴놓는다. 고춧가루, 깨소금, 기름을 많이 넣어 비벼서 그릇에 담는다. 위에는 잡탕거리처럼 계란을 부쳐서 골패짝 만큼 썰어 얹고, 완자는 고기를 다져 잘 재워 구슬만큼씩 비비어 밀가루 약간 묻혀 계란을 씌워 부쳐 얹는다. 비빔밥 상에 장국은 잡탕국으로 해서 쓴다.’
상주는 시의전서의 문화적 가치를 재평가 하고 전통음식 명품화 사업 일환으로 시의전서 음식체험관 ‘백강정’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직 전국적인 유명세는 전주나 진주를 능가하지 않지만 상주에 가면 곶감과 함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로서 비빔밥은 순수의 시기를 지나 유명한 존재가 됩니다. 특히 전주와 진주의 비빔밥은 각 고장의 이름을 앞에 지닌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1997년 마이클 잭슨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호텔에서는 채식을 좋아하는 그에게 비빔밥에 간장 양념을 얹어 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이 맛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1990년에 한국의 대표적인 항공사에서는 국제선에 비빔밥을 기내식으로 채택했습니다. 외국인들이 한국노선을 이용할 때 가장 선호하는 기내식 메뉴로 비빔밥을 꼽습니다.
기네스 펠트로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비빔밥 조리법을 소개하며 건강한 다이어트식으로 즐겨먹는다 했습니다. 이제 비빔밥은 한국을 넘어 세계인이 즐기는 유익한 실체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비벼먹는 해탈감
비빔밥을 받아 들면 산만했던 파편들이 모이면 완벽하게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숟가락을 들어 부비 부비 여지 없이 비벼냅니다. 밥알 사이로 저녁노을 같은 양념장과 나물들이 아름드리 물들어 갑니다.
집착이나 강박에서 자유로워 지며 남은 음식을 말끔히 치움으로써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청점심을 얻습니다. 골동반이라는 이름은 이 과정과 잘 어울립니다. 골동, 골동품이 될 수 있는 과거의 잔재들을 모두 모아 비벼먹는 밥이니까요. 성스러운 형식이나 절차가 아니라 그저 일상에서 먹는 식사에 깃들여 있습니다. 스님들의 발우공양처럼 말이지요. 비빔밥은 이렇게 일상에서 깨달음을 이끌어 내었던 음식이자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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